자타공인 블랙코미디 맛집. 그런데 이제 말장난을 곁들인
"신랄하고 도발적이고 특별하고 오만한
특유의 모습에 충실한 신예 작가"
_ 《상트르 프랑스》
누군가 "프랑스 소설 좀 추천해달라"라고 하면, 얕은 고민에 빠집니다. "음... 플로베르랑 프루스트, 아 그리고 카뮈도 읽으세요"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하기엔 너무 추천봇(bot) 같지 않나요? 보통 '서울대 권장 100선' 같은 뻔한 리스트를 기대하고 물어보는 건 아닐 테니 말이죠(그렇다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원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사르트르의 《닫힌 방, 선한 신》,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권합니다. 이 셋은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던 시절에도 '재미있다'라는 인상이 남았고, 실제로 조금 알고 다시 보니 '의미도 있다'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거든요. 문제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아… 그거 말고 다른 건?"
그러면 이제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조졌다….' 꼭 그럴 때 머릿속에 스치는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아멜리 노통(브)입니다. 벨기에 태생의 작가 아멜리 노통은 특유의 시니컬한 문체가 인상적인 작가입니다. 여러 인터뷰를 보면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처럼 털털한 느낌인데, 문체는 정반대에 있습니다. 기발한 소재, 짧은 호흡, 프랑스 문학 특유의 블랙코미디, 독자를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는 걸 넘어 두들겨 패는듯한 문장까지 말이죠.
일본에서 태어나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벨기에 작가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벨기에 작가인 노통(브, '이하 '노통')은 1967년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라라... 벨기에야 원래 고유어가 없고 프랑스 옆에 있다지만 일본이라니 벌써 심상치 않죠. 그래도 정체성은 당연히 벨기에인입니다. 노통은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세계 방방곡곡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는데요, 이러한 경험이 작품 곳곳에 드러납니다. 아니 에르노처럼 자전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데 천부적인 작가입니다. 에르노는 조금 덤덤한 편인데(물론 소재는 유교 국가 대한민국 기준으로 파격적인 편이 많지만), 노통은 에르노보다 더 맵습니다. 불륜 같은 건 기본입니다.
저는 벨기에 사람이어서, 오로지 벨기에 사람일 뿐이라서 행복해요.
저는 벨기에 억양을 감출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파리에 거주하긴 하지만 벨기에에도 집이 있어요.
파리에서 브뤼셀까지는 기차로 1시간 20분밖에 안 걸리죠.
오후 5시에, 불쑥 거기 가서 저녁을 먹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어요.
_ 〈리브르 쉬르 레 케Livre sur les quais〉의 인터뷰 中
노통은 1992년 25세 때 데뷔작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한 번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파격적인 젊은 프랑스 작가' 이미지가 강합니다. 물론 실제론 젊지도(내일모레 환갑이십니다), 프랑스도(프랑스어로 쓰긴 하지만 벨기에 사람입니다) 아니지만, '파격적'이라는 이미지만큼은 여전합니다. 이야기광이라는 별명답게 1년에 1권씩 꼭 출간합니다(그래서 요새는 소재가 떨어졌는지 폼이 좀 별로...).
여기서 파격적이라는 말은 양날검 같은데, 기발한 발상이면서도 1990년대 작가 특유의 '뭐라는 거야?' 같은 점도 있습니다. 그래도 '뭐라는 거야?'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누보로망('신소설', 대체로 난해한 작가주의 작품) 계열은 아니라서 크게 걸리진 않으실 겁니다. 여담이지만 그의 원서 표지는 거의 모두 자기 얼굴을 넣는데, 신간마다 이번에는 어떤 사진인지 보는 맛이 있습니다.
매년 새로운 사진으로 찾아오는 걸 생각하면 영화 〈보이후드〉 같기도 하네요.
팬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카뮈와 뷔야르를 소개할 때는 조금 더 배경설명에 무게를 두고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배경을 알아야 더 재밌고 의미가 보이는, 그런 작품과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였거든요. 하지만 노통은 약간 궤가 다릅니다. 그냥 작품의 컨셉만 보고 픽하면 되는, 제게는 그런 느낌입니다. 노통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거 완전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네!' 같은 생각을 합니다. 타란티노 작품에는 장광설(아무말 대잔치)을 보는 맛과 '쪼는' 맛이 엄청나다 정도의 인상을 갖고 있는데요, 노통의 작품이 딱 그렇습니다. 여기에 소재도 참신하고 흡인력이 좋아서 별로 아는 게 없는 상태로 봐도 빠져들기 쉽습니다. 요즘 문학의 트렌드인 단편 내지는 경장편에 아주 최적화된 작가죠.
타인은 지옥이야!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오후 네시》는 아멜리 노통의 작품 중 가장 컴팩트한 편입니다. 1995년 작품이니 한창 파격맛이 무르익던 리즈 시절의 노통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신 발언하자면 최근 작품은 다소 아쉬운 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초창기 작품인《오후 네시》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타란티노의 작품처럼 별다른 사건 없이 대화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맛이 아주 잘 드러납니다.
인간은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살아가지.
자살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야. 살인자들은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연인들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
작품의 초반부는 은퇴한 중년 부부의 전원생활, 벨기에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자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듯"한 서사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매일 오후 네시에 찾아오는 괴상한 이웃이 등장하면서, 아멜리 노통식 블랙코미디가 펼쳐집니다. 느슨해진 일상에 긴장감을 주는 불편한 사람의 등장!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원제인 Les Catilinaires('반박')처럼 끊임없는 '논박'과 '야유'가 이어지는데요, 짤막한 작품이니 굳이 서사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일단 한 번 맛 보시라! 감히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광설을 좋아한다면, 이 책도 좋아하시리라 반쯤 확신합니다.
아멜리 노통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죄다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의 화장법》에서는 공항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 《오후 네시》에서는 우연히 마주하게 된 이웃이, 《사랑의 파괴》에서는 풋풋한 사춘기의 첫사랑이 만드는 하나의 지옥 말이죠. 이 지옥은 잔인하지만 노통은 그 잔인함 속에서 유머를, 엄청난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냅니다. 여러 나라를 떠돈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인지 그 지옥의 모습이 참 다채롭습니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 같은 '프랑스 여성 작가'와는 결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번에는 노통이 어떤 지옥을 만들어내고 이 지옥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짜릿하게 만드는가, 여기에 포커스를 두신다면 다른 작품을 읽으실 때도 떠오르실 듯합니다.
보너스: 함께 보면 좋을 무언가(들)
이번 글은 작품보다 아멜리 노통이라는 작가를 소개드렸습니다. 그래서 함께 보면 좋은 것들도 노통의 다른 책을 권해드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노통의 작품(주로 한창 폼이 좋은 초기작)은 컨셉만 보고 훅하다 싶으시면 잡아보셔도 괜찮으실 겁니다. 아래는 추천작과 한줄 컨셉입니다. 왜 죄다 초기 작품이냐고요? ...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 살인자의 건강법(Hygiène de l'assassin, 1992)
- '선생님, 죄송한데 선생님 소설 진짜 구려요. '
- 대문호와 독자(기자)의 처절하고 옹졸한 말장난 대잔치
- 사랑의 파괴(Le Sabotage amoureux, 1993)
- '여전해줘서, 여전히 나쁜뇬이어서 고마워...'(아마 인터넷 좀 하신 분이라면, 이 소설을 각색한 만화를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첫사랑의 고통과 슬픔
- 두려움과 떨림(Stupeur et tremblements, 1999)
- '되게 좋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취뽀하고 와보니 쓰레기잖아?'
- 일본 블랙기업에 입사한 어느 신입사원의 분투기
- 적의 화장법(Cosmétique de l'ennemi, 2001)
- '저 사람은 뭔데 왜 자꾸 귀찮게 말 거는거야'
- 지루한 공항에서 펼쳐지는 말싸움 한바탕
[뱀꼬리]
2019년에는 《갈증》으로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1년에는 《첫 번째 피》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습니다. 공쿠르와 르노도 모두 '공로상'으로 보기엔 프랑스에서 권위가 있는 상들입니다... 만 《갈증》은 아직 읽지 않았음에도 평이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는군요. 《첫 번째 피》는 어떨까요? 하루 빨리 번역출간되기를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