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

죽을 때까지 문단계를 능욕했던 소설가(들)

오로지 edior-ozi 2024. 7. 9. 16:50

06 [작가 특집] 로맹 가리

 

작가와 작품은 따로 떼놓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작품보다 작가의 삶이 더(혹은 비슷하게) 재밌는 경우도 왕왕 있죠. 그리고 제가 늘 하는 말이긴 하지만 작가의 삶에 작품이 온전히 담겨 있는 경우도 많아서, 작품을 잘 이해하려면 작가의 삶까지 들여다 볼 필요도 있습니다. 사람 사는 게 다 다르고 각자의 맛이 있겠지만은, '앞으로 이런 삶을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싶은 작가의 삶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삶. C'EST LA VIE.

로만 카체프의 어린 시절. 잘생겼네요.

1914년, 러시아의 한 유대인 부부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이름은 로만 레이보비치 카체프. 아버지는 그와 그의 어머니를 버렸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유대인 탄압이 거세지자 로만은 어머니와 함께 서유럽으로 떠나 1927년에 프랑스에 정착합니다. 로만 신분 상승을 위해 법학을 공부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랑스 공군에 입대했고, 공적을 세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습니다. 로만은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꼭 성공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습니다. 결국 외교관이 되어, 그 의지를 실현하게 되죠. 그는 일하면서 여러 소설을 발표합니다. 단, 유태인 혈통이 컴플렉스였던 그는 본명 대신 뤼시앵 브륄라르 등 여러 필명으로 투고 활동을 하는데요, 데뷔작인 <폭풍우>에서는 바로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문단에 등장합니다.

이후 로만, 아니 로맹 가리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다룬 <유럽의 교육>으로 프랑스 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단박에 프랑스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로맹 가리의 작품은 퐁당퐁당이 제법 심한 편이어서 호평과 혹평 사이를 오락가락했고, 가리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 우울감 속에서도 1956년, 따뜻한 휴머니즘을 소재로 한 <하늘의 뿌리>를 발표하면서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이전에 에리크 뷔야르에서 소개했던 그 상입니다)을 수상합니다. 1959년에는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진 시버그와 재혼하면서, 이제는 더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였죠. 1960년에는 중년 작가가 으레하듯,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을 출간합니다. 여기까진 좋았지만, 그놈의 퐁당퐁당은 어디 가지 않는지, 1970년대에는 '퇴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내가 한 모든 것, 그것은 네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 일이란다. 

나한테 화내면 안 돼. 난 잘 지낸다. 널 기다린다." _<새벽의 약속>

 

혜성 같은 조카의 등장과 추락하는 삼촌의 명예

로맹 가리의 퇴물화가 진행 중이던 1975년, <그로 칼랭>이라는 폭풍 같은 작품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신인 에밀 아자르가 공쿠르상 본상(신인 작가에게 주는 공쿠르상이 따로 있지만 여기서는 '본상'입니다)을 수상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부터 이미 간지력으로는 합격 목걸이가 거뜬한 명작을 쓴 신인이었죠. 사실 그는 로맹 가리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역시 문학가 가문은 뿌리부터 다른가 봅니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등장에 적잖이 놀랐나 봅니다. 자기 작품에 조카의 스타일을 반영하게 됩니다. <자기 앞의 생> 이후 출간된 로맹 가리의 작품은 "조카 에밀 아자르를 표절한 게 아니냐"라는 비평가들의 혹독한 평을 듣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과 머리이며, 그래서 그것들은 아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심장이 멎으면 사람은 더이상살 수 없게 되고,

뇌가 풀려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 사람은 더이상 제힘으로 살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일찍부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된다 _<자기 앞의 생>

게다가 1979년 아내 진 시버그가 실종되면서 안 그래도 예민한 로맹 가리는 더더욱 심연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결국 1980년 12월 2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한 작가의 삶도 그대로 저물고 맙니다.

 

프랑스를 뒤흔든 희대의 사기극

로맹 가리의 유서는 로맹 가리가 사망한 지 6개월 후,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소책자로 발간됩니다. 조카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았으면 유서에 조카의 이름까지….가 아니라, 여기서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 본인이었음을 밝힙니다. 당대 프랑스 문단과 평론가들을 폭풍디스하면서 말이죠.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이러한 충격적인 사실이 공개되면서 프랑스 문단계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집니다. 공쿠르상은 원래 한 작가에게 오직 한 번만 수여되는 상인데다가, 그 전까지 로맹 가리는 '퇴물' 그 자체였거든요. 그런 퇴물이 무려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차라리 '자가복제'라고 디스했으면 이런 수치까진 없었을텐데 말이죠. 물론 이 한 방을 맥이려고 극단적 선택을 한 건 아니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습니다. (물론 평론가들이 다 쓰레기 같은 족속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시에는 그런 결과로 이어졌지만… ㅎㅎ)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나오는 극한의 휴머니즘

작품보다 작가에 주목해서 쓰다 보니 저도 이게 나무위키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게, 로맹 가리의 작품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비교적 일관된 주제 의식과 다양한 필명으로 드러나는 '페르소나'를 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어. 우리는 빛을 향해 가고 있어." (...)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아" _ <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의 두 공쿠르상 수상작, 즉 이 글에서 가장 만나보신 <자기 앞의 생>과 <하늘의 뿌리>는 모두 참담한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주제로 합니다. 사실 전쟁을 거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모습을 경험한 20세기 작가들에게 이런 주제는 흔한 편인데, 작품마다 이를 풀어가는 로맹 가리의 문체가 빛을 발합니다. 풍운아 같은 삶에 비해 조금 유려하달까요, 읽기도 편하고요. 또 이런 삶을 알아야 작품이 더 맛있게 느껴지리라 확신합니다.

 

보너스: 함께 보면 좋을 무언가(들)

 

〈새벽의 약속〉(2018)

로맹 가리의 동명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앞에서 잠깐 로맹 가리와 그의 어머니 얘기를 했는데요, 너무 길어지고 신파가 될 것 같아 생략했지만 정말 애틋합니다. 그들의 스토리가 담긴 절절한 작품입니다.

〈타인의 삶〉(2015)

비밀경찰 대위 비슬러의 시선을 통해 동독의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인권탄압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로맹 가리와 접점이 거의 없을 정도지만, '휴머니즘'이라는 그 하나의 질긴 끈이 서로 다른 두 작품을 이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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