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삭막한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순 있을까?
《정체성(L'Identite)》
_ 밀란 쿤데라
'나'라는 사람의 실체란 게 있을까?
정체성, 정체성, 정체성. 귀가 아프도록 자주 듣는 단어지만 그럼에도 너무 어색하다. 정체성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분명 만드는 주체는 ‘나’지만 온전히 내가 만들어간다기에는 타인의 시선이 너무 많이 개입된다.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토대로 가치관을 형성해가고 청소년기를 지날수록 안정성을 갖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면 성인의 정체성은 안정적인가?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 성숙해지고 관계를 가질수록 정체성은 희미해진다.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수록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도 같다. 그런데, 애써 생각 속에서 밀어내려는 이 단어를 제목으로 떡 하니 내놓은 책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는 샹탈과 장마르크, 두 남녀가 관계 속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샹탈이 “더 이상 남자들이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마침 장마르크도 해변에서 샹탈과 낯선 여자를 헷갈릴 만큼, 그에게 있어서 ‘샹탈’이라는 여자의 정체성이 강렬하지 못했던 때였는데, 의기소침해진 샹탈을 달래고 그녀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장마르크의 선택은 ‘시라노’라는 익명으로 그녀에게 애정 가득 담긴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샹탈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곧 내 그녀의 자긍심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장마르크가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남성을 질투하기에 이른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여기서 또 나오는 또존주의…
실존하지 않는 존재 때문에, 실존하고 있는 두 사람의 정체성은 달라진다. 샹탈에게는 아들의 죽음과 이혼이라는 과거가 있다. 겉보기에는 슬픈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들의 죽음은 죄책감과 더불어 그녀에게 ‘자유를 선물’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아내 혹은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굴레가 그녀를 옥죄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런던과 난교의 이미지는 그녀가 억누르고 있었던 욕망을 대변한다. 그녀는 ‘두 가지 얼굴’을 쓴 채 살아왔고, 그런대로 잘 견뎌왔다. 그러나 더 이상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긍심은 주저앉아버리고 편지 하나에 생기가 돋아날 만큼 그녀의 정체성은 유동적이다.
장마르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웃지 않아. 내겐 두 얼굴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두 얼굴을 갖는 것에서 어떤 재미를 찾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두 얼굴을 갖는 것은 쉽지 않아. 노력을 요하고 규율을 요구하는 거야!
그의 연인인 장 마르크의 경우는 샹탈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F라는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일화와 의학을 공부했던 지난날들, 그리고 평소 그의 언행들은 그가 냉철했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보여준다.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살아왔던 샹탈에 비해 그는 한 가지 얼굴만을 가지고 다닌 편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에 의해 변한 샹탈을 보고 ‘시라노’를 질투하고 만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을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견고했던 그의 정체성이 시라노에 의해 흐물흐물해진 것이다.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어쩔 수 없이, 타인은 지옥이야!
결국 소설을 후반부까지 이끌어가는 것은 타인,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하지 않을 수도 있는 타인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건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으니까. ‘시라노’라는 얼굴 없는 남자로 인해 샹탈과 장마르크는 서로에게서 더욱 강렬한 정체성을 발견한다. 편지를 속옷 속에 숨긴 일로 두 남녀는 서로 다투고, 샹탈은 무작정 런던으로 떠났다가 홀로 번뇌한 뒤, 장마르크를 다시 만나고 서로의 정체성을 깊게 각인하며 사랑이 더욱 애틋해진다. 이렇게 소설이 마무리된다면, 이미 많은 예술에서 다뤘던 주제를 뻔한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상투적인 주제를 연인 간의 사랑을 통해 다룬 평범한 소설이다.
하지만 쿤데라는 결말부에 환상이라는 요소를 삽입한다. 샹탈이 무작정 욕망의 런던으로 떠난 이야기를 보여준 뒤에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181p)”라며 이야기를 뒤집고, 여태까지 전지적으로 전개했던 소설의 50장에는 ‘나’라는 화자를 언급하며 관찰자 시점으로 옮겨 놓는다. 예상해왔던 전개를 예상치 못하게 뒤엎으면서 쿤데라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소설가의 심술 하나에 너무도 쉽게 뒤집혀버리는 소설처럼, 개개인의 정체성도 너무도 가벼우니 참을 수 없는 정체성의 가벼움에도 분노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정체성은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도 쉽게 흔들린다.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무색할 정도로, 세상에 변하지 아니하는 것이 얼마나 될까?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정체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 임은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착화되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순간, 그 정체성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극한에 다다른 정체성은 사람을 아집에 가두기도 한다. 아마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며 받아들이고 내뱉어내는 과정은 특정한 정체성을 갖기 위함보다는 가지지 말아야 할 정체성을 하나둘 기록하기 위함이 아닐까? 어제도, 오늘도, 내 정체성은 흔들리고 앞으로도 종종 흔들릴 테지만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갈대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