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체로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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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

타인은 지옥이야! 그런데 왜 지옥이야?

오로지 edior-ozi 2021. 12. 15. 11:11
《닫힌 방(Huis clos)》
_  장폴 사르트르

저 새끼랑은 도저히 같이 못 살겠네, 저건 지옥이야 지옥

사르트르와 카뮈는 모두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다. 두 사람은 서로 친분이 있기도 했고, 작품들을 통해 보여준 실존주의 철학과 부조리 철학은 서로 닮았다. 사실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기 때문에 두 작가를 접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카뮈의 『이방인』과 사르트르의 『구토』 를 읽고 난 후에는 카뮈에게 좀 더 마음이 갔다. 사르트르의 글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해서 『구토』를 읽고 난 후에 사르트르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다. 사르트르- 읽어야지- 읽어야지-하고는 시도도 못했다. 그런데 '프랑스 문학의 이해' 수업에서 이 작품을 접했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 첫 시간만에 나는 그 글에 매혹됐다. 사르트르치고는(?) 읽기 쉬웠다. 80p의 짤막한 분량의 극본인 '닫힌 방'은 색다른 설정과 실존주의의 집약으로 많은 곳에서 꾸준히 상영되고 있다고 한다.

http://www.carrepluriel.com/la-genese-de-huis-clos/

같은 방에 갇힌 세 남녀, 그들에겐 비밀이 있다

극은 가르생이라는 남자가 '제2제정'풍의 방으로 내던져지면서 시작한다. 내던져진다. 사르트르가 말한 '기투', 그러니까 세상 앞으로 스스로를 내 던지는 것, 'se pro-jeter'가 극의 시작부터 표현된다. 고로 가르생이 들어오게 되는 방은 수많은 선택으로 가득 찬 세계일 것이다.
수많은 선택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보기에 방은 너무도 '깔끔'하다. 제2 제정풍에 청동 조각상 하나와 짙은 녹색의 장의자와 진홍색 의자, 고장 난 건지 잘 울리지 않는 초인종이 방에 대한 묘사의 전부다. 깔끔한 방으로 사환이 두 명의 여성을 더 데려오고 문은 닫힌다. 닫혀있는 방, 눈 깜빡 임의 찰나의 단절조차 허락되지 않고 밤이 없는 영원한 시간 속의 방에 세 남녀가 모여있다.
반전신문을 쓰다가 총살당한 가르생, 우체국 직원이던 이네스와 돈 많은 여성 에스텔. 이들은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무슨 공통점이 있어서? 아니면 모두 지옥에 올만한 짓거리를 했다든지? 영원한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사이에 비밀이란 없다.
사실은 탈영병이자 외도를 일삼았던 가르생, 동성애자로서 사랑하는 여인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정까지 파괴해버린 이네스, 불륜으로 생긴 아기를 살해한 에스텔. 모두의 비밀이 공개되면서 그들은 서로의 욕구에 눈을 뜬다. 이네스로부터 '비겁자'가 아니라는 인정을 받고 구원받고 싶어하는 가르생, 에스텔과의 동성애를 꿈꾸는 이네스, 남성-여기서 유일한 남성인 가르생-의 사랑을 원하는 에스텔. 이 셋의 욕망이 교차하지만 가위바위보처럼 맞물리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다. 고문기구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진정한 의미의 '지옥'이 펼쳐진다.

가르생 그러니까 이런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에스텔 내 사랑!

결국 세 사람의 욕망의 분출 속에서 가르생은 이 세 욕구가 똘똘 뭉쳐있는 상황이, 영원히 이어질 것을 직감한다. 게다가 이미 그들은 저승에 있지만 여전히 남의 눈치를 봐야만 한다. 자신의 행동이 주체적인 것이 아닌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다고 느낀 가르생은 말한다.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이렇게 계속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나?

짤막한 이야기 속에 사르트르는 그가 생각하는 고풍스러운 지옥을 만들어내고, 그의 생각을 담아냈다. 우선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명제로 대변된다. 이는 또 사물과 사람으로 나뉘는데, 사물들이야 사물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에 의해 본질이 결정되지만, 사람이 태어날 때 '~하기 위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몸뚱이 딸랑 있는 본질이 아니라 개인의 의식이 일구어가는 자아-실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르트르의 존재론은 '즉자'와 '대자'의 개념을 사용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즉자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자 충족된 것(진리)이고 '존재'다.
반대로 대자는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며 결핍된 것이고 인간의 의식과 '무를 뜻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즉자의 삶을 원한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고 싶어하지만, 인간이란 원체가 완전할 수가 없기에 항상 대자의 위치에 머무른다. 물론 정말로 스스로가 즉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르트르는 상욕을 퍼부었다. '자기기만에 빠진 병신 새끼ㅉㅉ'라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은 사물과 관계를 맺곤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는다. 사물과의 관계라면 즉자와 대자의 관계 정립이 편할 수 있지만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때는 쉽지 않다. 왜? 다른 사람들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방을 주체의 입장에서 객체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생각하는 게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서로가 주체가 되고자하는 끝없는 갈등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이 타인의 시선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부터 개인은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린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마구마구 뱉고 하고 싶은 행동들을 마구마구 저질러버리고 싶은데, 이에는 타인의 시선이 작용돼서 머뭇거리게 된다.
『닫힌 방』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우선 이미 '죽은 존재'이기 떄문에, 그들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후회하고 복기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든지 이승에서의 삶은 변할 수 없으니까, 그들은 정말 굳어버린 시체라는 사물에 불과하며 그들의 멘탈은 부관참시라도 당하는 듯 갈기갈기 찢긴다. 그들의 '옛' 삶이 이제는 인간대 인간이 아니라 인간 대 사물로 놓이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승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욕구를 가져보지만 저승에서라고 욕구들이 맘껏 저질를 수 있냐? 안타깝게도 그건 또 아니다. 이 욕구들은 역시나 타인의 시선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작품 중에는 '거울'이라는 존재가 없다. 그래서 립스틱을 잘 바르지 못한 에스텔은 이네스의 눈을 거울로 쓰기도 한다. 장르가 극인 것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거울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 내지는 몰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어 관계를 맺지 못하는 상징일 것이다. 저승이라는 공간에선 지금의 자아는 없고 이미 굳어버린 현생의 자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스로의 실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타인과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에스텔 나는 내 모습을 못 보면 나를 만져봐도 소용이 없어요, 내가 진짜로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죠.

결국 이번에도 '선택'과 '책임'의 굴레

스스로의 실존도 명확하게 답할 수 없고 생전의 삶은 돌이킬 수 없으며 상대방의 시선은 따가울 정도로 가까우며 이 시간이 끝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닫힌 방에서 세 사람은 서로의 욕망과 자아의 주체면서 또 객체다. 서로의 꼬리만을 물뿐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과, 변경할 수 없어 이미 고정된 본질만이 함께하는 영원한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우연히 문이 열렸음에도 문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나갈 수가 없다. 문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 즉 즉자가 된다는 것인데 살아 있으나 죽어 있으나 영원히 대자의 입장인 것은 변함이 없다. 대자조차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가르생이 말한 타인들의 지옥이란 바로 이 '닫힌 방'속에서의 시간 이리라.
실존을 위해서 인간은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며 심지어는 그 선택에 타인의 시선까지 의식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항상 고민하게 되며 이는 당연한 일인데 더 이상 실존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일는지- 사르트르가 생각한 답은 타인의 시선이 지옥이라는 가르생의 말에 있는 듯하다.
열심히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굴려보며 이해를 해보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확실한 건 자신의 깊은 철학을 짤막한 극본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정말 사르트르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저승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또 그 안에서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는 않을는지.

덧붙이자면, 이러한 사르트르의 비관론적 실존주의는 카뮈와 결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카뮈는 "부조리 철학은 실존주의의 끝에서 출발한다"고 했는데, 이는 카뮈의 '끝없는 반항'의 기저에 낙관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실이 조까튼 건 알아도 끊임없이 맞서야 한다는 카뮈에게 항상 '대자'에 불과하다는 사르트르는 그저 "어차피 답은 없으니 자살해라" 정도로 들렸을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추후 사르트르가 자신의 사상에 대해 항변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조금은 해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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