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비밀(L’Ordre du jour)》
_ 에리크 뷔야르
노벨문학상도 좋지만, 가끔은 공쿠르상
매년 10월, 출판계에는 '찻잔 속의 폭풍'이 입니다.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는 시기이기 때문인데요, 각종 서점과 출판사 그리고 언론계(일부)는 발표 순간을 카운트다운하듯 기다립니다. 올해 수상자는 탄자니아 출신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되면서, 한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작년의 루이즈 글릭도 그렇고, 국내에 소개된 적 없는 작가였거든요. 덕분에 작가 이름의 표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잠시 동안 뜨거운 관심사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국내 M 출판사에서 번역 및 출간될 것으로 보입니다(저도 듣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밀란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등 국내 출판사들이 좋아할만한 작가들이 연거푸 물먹으면서 '노벨문학상 무용론'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문학출판사에 다니지 않는 저로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명실상부 출판마케터의 빅 이벤트긴 하죠. 어쨌든 이벤트를 걸만 한 대축제니까요. 국내에는 노벨문학상 정도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대형 문학상이 몇몇 있습니다. 한강 작가 덕분에(?) 유명해진 부커상Booker Prize, 오로지 프랑스에서만 진행되는 공쿠르상Prix Goncourt이 대표적이죠. 저는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탓에 아무래도 공쿠르상에 조금 더 관심을 두는 편입니다. 프랑스'에서만' 진행하는 문학상인데도,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죠.
1933년, 그날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이번에 소개해드릴 에리크 뷔야르Éric Vuillard의 《그날의 비밀》은 2017년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1933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16편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33년'과 '유럽', 눈치가 빠르신 분은 이 두 단어만 봐도 작품의 주제를 아실 겁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죠. 짤막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과 그 이면에 있었던 은밀한 회담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나치당의 히틀러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엄청난 비극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인 1933년부터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사실상 통일을 추진하는 등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스물넷 각국 고위급 인사의 '비밀 회동'에서 시작합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전쟁의 준비라니, 매우 무겁고 진지하게 진행될 법하죠. 전쟁 소설이니 만큼 문장만 봐도 총소리가 들릴 듯한 처절한 묘사가 기대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특이합니다. 영국의 장관은 히틀러를 시종정도로 착각하고 외투를 건네고, 이후로도 대학로 연극에서나 볼 법한 어처구니없는 대화, 거친 협박과 맥없는 순응이 오고 갑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와 흐름이지만, 이야기는 우리가 예상했던 역사적 사실로 나아갑니다. 아주 조용하고, 은밀한 제2차 세계대전 말이죠.
'그날의 일을 들춰내지 않는다면 '그날의 비밀'이 된다
그러나 병합 직전 단 일주일 동안 1천7백 건이 넘는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곧바로 신문에 자살을 보도하는 것이 저항 행위가 될 것이었다.
몇몇 기사들은 여전히 이를 두고 감히 〈급사〉라 표현했다.
이처럼 부조리극처럼 맥없이 흘러가는 작품은 종반으로 치닿으며 조금씩 선명해집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여전히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이어졌지만(탱크의 '러시 아워'), 이른 바 '자살당하는' 일이 펼쳐지며 우리가 아는 그 비극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그 전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습니다. 앞에서 그렇게 실컷 묘사했던 '그날의 비밀'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는 결코 같은 심연에 두 번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공포와 우스꽝스러움이 혼재된 상태에서 떨어진다.
이 작품에서 에리크 뷔야르는 다시 한번 전쟁을 꺼내들고, 전쟁의 '덕'을 본 이들을 예의 주시합니다. 스물네 명 중 전범죄로 처형된 이도 있지만, 오늘날까지 당시의 부를 향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인물이자 군수기업' 크루프사'의 회장 크루프Friedrich Krupp처럼요. 그는 전쟁 이후에도 치매를 이유로 재판을 받지 않았고, 크루프사는 경영을 재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크루프는 경쟁 업체인 티센과 합병하며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 티센크루프가 되었습니다. 결국 수많은 무고한 사람의 피가 정작 죄가 많은 이들의 엄청난 부로 환산된 셈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roman'이 아닌 '이야기recit'로 명하며, 뷔야르식 '역사 다시 읽기'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이 모든 일이 단순히 소설 속 '가짜'였으면 좋겠지만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역사 다시 읽기는 주로 커트 보니것의 풍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풍자'적 요소는 커트 보니것이 조금 더 찰진 편입니다.) 먼 나라 유럽의 일이라고 하기엔 우리도 비슷한 일을 겪었죠. 그리고 여전히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과거가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그 운율은 반복되니까요. 앞으로 우리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면, 운율의 반복을 의식적으로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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